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도연맹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전쟁 발발 무렵 보도연맹원들 동향 === 전쟁 발발 무렵의 보도연맹원 대부분은 정부의 지시에 잘 따랐다고 한다. [[오제도]]와 [[정희택]][*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 초창기 [[오제도]], [[선우종원]]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운용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으로, [[오제도]]와 더불어 오늘날 공안 검사의 '대부'의 위치 격에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6.25 전쟁]] 시기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 숨어 지내다가 9.28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서 부역자들을 심사했던 인물이다. 훗날 1980년대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에 따르면 6월 28일 서울을 철수하기까지 각 구(區) 보도연맹 지부를 돌아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의 모든 '동태를 장악'하였는데, 서울 지역 보도연맹원은 개전 초기 예비검속되어 각종 반공 구호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6월 28일 정부가 피난 가기까지 서울지방 보도연맹원들 상당수는 예비검속된 후 담당 검사의 통제를 받았다. 서울 지역은 각 구(區) 보도연맹원은 검찰 지휘 하에 소집되어 반공 활동을 하였고, 보도연맹 의무실(전 공산당에서 전향한 의사, 간호원으로 편성)에는 비상구호반이 조직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란민 안내와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희택은 "시민이 피란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6,800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정희택은 "6.25가 터지자 나는 보련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고,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부착 등의 일을 했다. 서소문동 본부에서 자신과 맹원 간부들이 지휘를 했으며,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 6천8백 명의 보련은 일사분란하게 상부 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이어, 정희택은 '(북한군 점령기에)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좌익범' 중 부역을 한 사람이 적었다'고 증언했다. 정희택 증언,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3◆, 1983, 132쪽.] ※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에 충성했다는 자료 내용''' >"1950년 3월 철도보도연맹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6.25 때 후퇴하는 가운데 철도 수송에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정부에 충성했었다. 6.25 사변이 돌발하자 25일에는 타공전시체제(打共戰時體制) 강화를 했고, 26일과 27일 양일은 특히 보련 의무실이 청량리 밖 문이과대학 교정터에 이동의무실을 가설하고 2백여 명의 피난민을 무료로 구호했던 것이다." >---- >[[오제도]], 『공산주의 ABC』, 삼훈출판사, 1984.- p131- > "특히 후방지역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중심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기도 했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던 7월 이후 부산과 마산에서는 많은 보도연맹원이 국군 위문금과 금품을 자진해 거출하였고, 남한 정부에 재차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 자원입대를 혈서로 쓰기도 했다." >----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역사비평사, 2002, 89~94쪽.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이 각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한강 이남 지역에서 대채로 보도연맹원 등 좌익들이 소요나 무장폭동 등과 같은 집단적인 행위를 야기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서울 함락 전야에는 일부 소요가 있었긴 있었다)."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하)』, 역사비평사, 1999, 602쪽. 이처럼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을 다하려 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